이들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배용준의 팬클럽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번 모임이 ‘생일 파티 기념 투어’ 같은 여행사 이벤트로 진행된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배용준(42)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개개인이 한국에 입국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배용준의 생일이 되면 축하 편지를 한 통씩 썼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매년 소속사로 전달했다는 점이다. 그런 축하 이벤트를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다.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지만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심전심은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파티를 주최한 사람은 있다. 10년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생일 축하 편지나 카드를 책으로 엮어 배용준의 생일에 맞춰 직접 소속사에 전달한 안도 마사코씨와 아이바 토시에씨다. 이들은 1년 전부터 장소 섭외 등 이번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몇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무엇보다 10년간 매년 같은 날,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처음 일본 가족들의 편지 묶음 책을 전달할 때 ‘최소한 10년간 이어가보자’라고 결심하고 시작했죠. 이번에 목표를 이뤘다는 점에서 큰 성취감을 느껴요. 그걸 기념해 올해 생일은 한국에서 우리끼리 파티를 하자고 생각했죠.” (안도 마사코)
“10년이란 참 긴 시간이죠. 한국에서는 ‘강산이 변한다’라고 하잖아요? 물론 그 사이에 배용준씨의 팬을 그만두거나 다른 스타에게 옮겨간 사람들도 있어요. 그간 작품 활동이 뜸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변함없이 의리를 지킨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거죠.” (아이바 토시에)
배용준은 지난해 말 교제하고 있는 연인이 있음을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그동안 ‘결혼 초읽기’라는 기사도 많이 나왔을 정도로 진지한 관계다. 그러나 여기 모인 팬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올해 생일 축하 편지 내용 중에는 ‘빨리 결혼해서 안정된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쓴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기자도 과거 왕성한 팬클럽 활동을 해왔지만 스타를 항한 이들의 이해와 열렬한 지지는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이들은 스타를 향한 ‘팬심’을 넘어 ‘성을 초월한 인간애’로 발전하고 있는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를 통해 내 삶이 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배용준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면서 그의 팬이 되고부터 자신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 변했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가정불화에서 온 우울감을 떨칠 수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팬들끼리의 교류로 생활의 활기와 건강을 되찾기도 했다.
“일본은 황혼 이혼이 많아요. 저도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난 뒤 남편과의 불화가 심해서 이혼 직전까지 갔었죠. 그때 우연히 ‘겨울연가’를 봤어요. ‘아, 나도 저런 빛나던 시절이 있었지’ 하며 그간 잊고 살았던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죠.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졌고 고집불통인 남편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요. 제 생활을 충실히 살고 때로는 한국 여행을 하며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렸지요. 마치 도피처라도 생긴 듯 말이죠.” (N씨)
늦은 나이에 마음이 맞는 친구와 인맥을 쌓는 것도 배용준의 팬이 되고 나서 생긴 기쁨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활의 변화에 이어 한국인들과 교류하며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한 팬들도 많다. 배용준의 팬들 중에는 유독 10여 년 전 일본 유학 중 지하철 선로에서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세상을 뜬 고 이수현씨의 장학재단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겨울연가’가 방영되던 그쯤과 맞물려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한국 배우인 배용준씨에게 반하고 동시에 의로운 한국 청년의 행동에 감명을 받은 팬들은 지금까지도 기부를 이어가고 있죠. 용준 가족 중에는 부산에 있는 고 이수현씨의 부모를 직접 만나러 가거나 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I씨)
또 미야타 키시에씨는 배용준의 출신 고교인 한영고등학교 일본어 동호회 ‘TOMO’에 정기적으로 일본 동화책이나 공부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물품을 전달하며 학생들과 교류하고 있다.
미야타씨는 학생들과의 교류를 힘이 닿는 그 순간까지 이어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이미 주변에도 그녀의 활동이 알려져 학교에 전달할 동화책들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녀는 배용준의 팬이 되지 않았다면 하지 못했을, 뜻깊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없어도 충분히 즐거운 파티
파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사자 없는 생일 파티, 과연 흥이 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각자 다양한 배용준의 사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얼굴에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는 포즈를 취하며 사춘기 소녀들처럼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의 사진으로 만든 대형 포토 케이크가 들어오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너도나도 모여들어 구경을 한다. 초에 불을 붙이고 능숙한 한국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최고령 참석자인 호조씨(92)가 대표로 촛불을 껐다. 그리고 평소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배용준이 즐겨 마신다는 프랑스 와인 ‘온다 도로, 카버네 소비뇽’으로 건배를 했다. 사실 이번 파티 장소인 ‘뱅가’는 배용준의 단골 와인 바였고, 그런 이유로 10주년 파티 장소로 선정됐다. 지난 2011년에는 배용준이 기획한 서적, 「와인과 사람」의 출간회를 연 장소이기도 하다. 팬들은 해당 와인 바를 통해 상상하지 못한 깜짝 선물을 받기도 했다. 팬들을 위해 ‘항상 건강하길 바랍니다’라고 쓰인 친필 사인북을 직접 배용준에게 받아 경품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가위바위보 토너먼트를 통해 행운의 주인공을 가렸으며 사인북을 받은 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생일 파티 전날 입국해 배용준이 다닌다는 헤어숍에서 우연히 그를 목격한 ‘운 좋은’ 팬들도 있었다. 이 팬들은 앞에 나와 ‘배용준 생생 목격담(?)’을 증언하는 시간도 가졌다.
“배용준씨는 드라마 ‘호텔리어’의 동혁처럼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어요(팬들 대다수는 배용준 최고의 드라마로 ‘호텔리어’를 뽑았다). ‘생일 축하해요’라고 했더니 살짝 웃어주었어요. 상큼한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답니다.”
한편 당일 배용준은 42번째 생일을 맞아 지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파티에 직접 참석한 측근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생일에는 연인 구소희씨의 친한 친구들까지 초대해 두 사람의 애정을 과시했다고 한다. 여전히 원만하게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팬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이 내년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 다음날인 8월 30일,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배용준의 개인 페이스북에 사진이 올라왔는데, 대형 생일 케이크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 짧은 커트 헤어스타일 덕분에 최근 모습임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연인과 함께한 생일 파티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 사진은 올린 지 5시간 만에 삭제돼 현재는 공개적으로 볼 수 없는 상태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