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정원 여행자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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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꿈틀대는 생명의 늪은 하늘과 뭍과 물의 생물들을 끌어당기고 품어낸다. 아무리 작고 약해도 한낱 미물이라 업신여기는 법이 없다. 자라풀은 자라풀대로, 논우렁은 논우렁대로, 늪에 깃든 생명체들은 제 쓸모와 살아갈 이유가 자명하다. 1억4,000만 년의 시간이 고인 원시 정원에서, ‘누군가 막 꾸다 만 꿈’을 만났다.

느릿느릿 장대로 밀면서 나아가는 거룻배는 우포늪의 시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느릿느릿 장대로 밀면서 나아가는 거룻배는 우포늪의 시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우포늪의 생성 시기는 약 1억4,0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생성 시기와도 같은 중생대 백악기, 까마득한 공룡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우포늪을 ‘생태계의 고문서’이자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일컫는 이유도 그 때문. 황동규 시인은 우포늪을 두고 “돌을 던져도 시침(時針)이 보이지 않는 곳”, “누군가 막 꾸다 만 꿈같다”라고 노래했다. 뭍도 물도 아닌 늪은 바꾸어 말하면 뭍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한 셈인데, 이 모호함은 불가해한 신비와 유연한 상상력을 끝없이 부추긴다.

여름날 우포늪엔 마름, 자라풀, 개구리밥 등의 수생식물로 진초록 융단이 깔린다.

여름날 우포늪엔 마름, 자라풀, 개구리밥 등의 수생식물로 진초록 융단이 깔린다.

늪은 품이 넓다. 뭍에 사는 동식물과 물에 사는 동식물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생명들을 모두 품어내니 가히 ‘생태계의 자궁’이라 불릴 만하다. 늪에 대한 백과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수심 3m 이하의 호수와 비슷한 물웅덩이. 호수-늪-소택지(沼澤地) 순의 변천 과정에서 보면 노령기로 간주된다. 얕아서 침수식물이 바닥으로 무성하고 바람에도 물이 섞인다. 실지렁이가 풍부해 영양분이 많은 편이다.’

장재마을의 무성한 왕버들 군락은 원시 자연의 멋을 선사한다.

장재마을의 무성한 왕버들 군락은 원시 자연의 멋을 선사한다.

과학적 지식의 덤덤한 나열 속에, ‘바람에도 물이 섞인다’라는 문장에 꽂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수심이 얕아 바람에 의해서 물이 교란되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물이 정체되는 일이 거의 없다’라는 설명이 뒤를 이었지만, 그 문장은 이미 ‘늪은 바람과도 몸을 섞는다’로 번역돼 입력됐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지만 늪지대의 물은 썩지 않는다. 늪에 깃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가열한 움직임 때문이다. 이파리를 수면 위로 펼치고 뿌리를 수중에 뻗거나 묻은 수생식물들은 물속 오염 물질을 빨아들이는 한편, 광합성으로 획득한 산소를 공급한다. 더욱이 야트막히 고인 물은 옅은 바람결에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즉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 이유다.

[정원 여행자]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정원 여행자]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개구리밥, 생이가래, 마름 등의 부유식물들이 그린 카펫을 펼쳐놓은 수면 위로 왜가리와 백로가 날아든다. 새들은 작은 물고기와 논우렁을 사냥하는 중이다. 새들의 먹이가 되기 전에 논우렁은 플랑크톤을 포식했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늪은 정지 화면처럼 고요하지만,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오래도록 지켜보면 꽤나 부산하고 치열한 생명의 움직임을 목도할 수 있다.

창녕박물관 인근에 펼쳐진 교동·송현동 고분군. 옛날 6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 왕들의 묘역이다.

창녕박물관 인근에 펼쳐진 교동·송현동 고분군. 옛날 6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 왕들의 묘역이다.

득음 못한 소리꾼의 한풀이 절창을 듣다
우포(소벌)·목포(나무벌)·사지포(모래벌)·쪽지벌을 총칭하는 우포늪은 창녕군 낙동강가의 4개 면(유어면·이방면·대합면·대지면)에 걸쳐 펼쳐져 있다. 총면적은 70만 평, ‘우포늪생명길’이라 이름 지은 탐방로는 12km 남짓하다. 탐방에 앞서 우포늪생태관을 먼저 둘러볼 것을 권한다. 현장감 있는 영상과 입체 모형,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1,000여 종에 달한다는 우포늪의 동식물들과 습지 생태를 예습할 수 있다. 그 계절에 만날 수 있는 대표 생물군 몇 종류의 이름만 알고 가도 보이는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생태 해설을 요청해 해설사와 함께 걷는 것도 좋겠다. 줄, 창포, 매자기 등 그저 ‘물풀’이라 통칭하던 물가 식물들의 고유한 이름을, 늘 헷갈리는 억새와 갈대의 확실한 구별법을 알려준다. 말끝마다 물음표를 달고 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저건 뭐예요?”를 연발하며, 답으로 돌아온 나비잠자리, 꼬리명주나비, 야관문, 흰뺨검둥오리 등의 이름을 새기는 시간이 꽤 행복하다. 간혹 풀숲이 급박하게 쑤석대는 소리에 놀라기도 하지만, 사람 발자국 소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고라니일 가능성이 크므로 조용히 지나쳐주자. 콩알 같은 고라니 똥이 흔한 길이다.

관룡사는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관룡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관룡사는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관룡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여름날의 우포는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눅진하게 녹아내릴 듯 짙은 초록이 수면 위에, 물가에, 천지간에 가득하다. 포플러나무 잎사귀는 바람과 수다라도 떨듯 쉼 없이 팔랑이고, 물가를 따라 도열한 버드나무 군락은 수면 위로 침묵처럼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때가 맞으면 늪을 뒤덮은 진초록 융단 가운데 이따금 꽃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마름은 하얀 꽃을, 가시연꽃은 자줏빛 꽃을, 노랑어리연꽃은 이름처럼 노란 꽃을 피운다.

한여름, 우포의 주인공은 가시연이다. 온몸에 가시가 돋친 가시연꽃은 자생지가 10여 군데뿐인 희소 식물로, 국내 식물 중 잎이 가장 크다. 잎의 지름이 크게는 2m에 달할 정도. 8월 말경, 가시투성이 잎을 뚫고 아기 주먹만 한 꽃송이를 밀어 올리는데, 귀하게 틔운 꽃도 꽃이지만 너른 잎을 펼쳐 늪을 완전히 점거한 풍경이 장관이다.

밤이 되면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해오라기, 중대백로, 왜가리와 같은 여름 철새들의 해 질 무렵 저공비행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저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분투가 있겠지만, 안식처로 깃드는 날갯짓은 유유자적하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퍽이나 요란하다. 왜가리가 평안도에서 ‘왁새’라 불리는 이유도 그 울음소리 때문이라 한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꾀꼴꾀꼴 울어 꾀꼬리요, 뻐꾹뻐꾹 울어 뻐꾸기이며, 왁왁 울어 왁새다.

영상과 입체 모형,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우포늪의 동식물들과 습지 생태를 공부할 수 있는 우포늪생태관.

영상과 입체 모형,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우포늪의 동식물들과 습지 생태를 공부할 수 있는 우포늪생태관.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 중 그 유명한 첫 구절,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의 으악새를 두고 ‘억새’다, ‘왁새’다 하는 주장이 대립한 적이 있다. 으악새가 억새의 경기 방언이기도 한 터라 슬피 우는 으악새란 가을바람에 물결치는 억새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왁새를 가락에 맞춰 으악새라 불렀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일단 왜가리 울음소리가 왁왁, 듣기에 따라 ‘으악으악’으로 들릴 수 있고, 2절의 첫 구절이 ‘아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인 것만 봐도 새 이름으로 대구를 이루는 게 아귀가 맞지 않느냐는 해석이다. 바람결에 풀어 헤친 억새 울음소리건, 봄에 왔다 가을에 떠나는 철새 울음소리건 구슬프긴 마찬가지니, 주체가 풀이든 새든 차진 노래 가사임은 분명하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왜가리 울음소리가 궁금하다면, 배한봉 시인의 ‘우포늪 왁새’를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우포로 오길. 여름 우포에선 득음 못한 소리꾼의 환생, 왁새의 한풀이 완창을 흔히 감상할 수 있다.

죽은 왕의 무덤은 산 자의 정원이다
창녕은 우포늪을 통해 생태 여행의 메카로 잘 알려졌지만,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유적과 문화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선(木舟)이 출토된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를 비롯해 고인돌과 고분, 진흥왕 척경비, 석빙고, 관룡사 대웅전과 같은 문화재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창녕박물관은 역사 유적 탐방의 출발점이다. 고분군에 관한 복원과 전시로 특화된 박물관인데, 1,500여 년 전 16세에 순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인골을 복원한 ‘송현이’가 눈길을 끈다. ‘송현이’는 인골 출토 지역인 송현동의 지명을 이용해 보다 친근하게 부르고자 붙인 애칭. 관습과 신분의 굴레에 묶여 성장판이 채 닫히기도 전에 산 채로 묻힌 1,500년 전 순장 소녀의 사연은 애처로움을 넘어 참혹하다.

박물관 인근에 펼쳐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듯 둘러보기 좋다. 이 고분군은 옛날 6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比火伽耶) 왕들의 묘역으로, ‘비화’는 빛벌, 즉 ‘빛이 좋은 들판’을 뜻한다. 빛 좋은 들판, 그중에서도 가장 양지바른 자리에 작은 동산 규모로 솟은 봉분 사이로 손을 맞잡은 연인이,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어머니가 지나간다. 어느 도시에서나 옛 왕들의 무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정원이 되게 마련이다. 생전에 누린 영화와 권세로도 모자라 무덤 속까지 진귀한 보물과 백성들을 산 채로 끌고 들어간 권력자들의 비정한 탐욕을 읽어내기엔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과 산책로가 지극히 평화롭다. 이렇게도 업보를 갈음하는가 싶다. 물결치듯 이어지는 고분군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기울어가는 햇살이 미끄럼을 타는 적요한 오후다.

해오라기, 백로, 쇠물닭 등 여름 철새가 날아들어 늪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해오라기, 백로, 쇠물닭 등 여름 철새가 날아들어 늪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 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배한봉, ‘우포늪 왁새’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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